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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주 시인 어머님의 유서

feelings 2022. 6. 12. 14:19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 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 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맺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애미를 용서하거라.


부탁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하는 날은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사는 거 별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애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별 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띠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대로 순수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 본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