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 - 안숙희
객사한 남편 소식에 27년 간 헤어져 살아온 여자 27년 간 함께 살아온 여자가 청량리 성바울 병원 영안실에서 만났다 실랑이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재를 담은 항아리를 영구차에 모시는 일은 27년 간 살아온 여자 몫 그 항아리 고향 선산에 모시는 일은 헤어져 살았던 여자의 몫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두고 몸으로 우는 여자 속으로 우는 여자 그 사이 만큼이 삶이어서 봄여름가을겨울 거기에 있었겠지 좋은 옷만 입히고 철마다 보약은 챙겨 먹였다는 말에 미워할 마음도 없다던 그녀
어떤 일입니까? - "객사한 남편 사망소식에/ 27년 간 헤어져 살아온 여자/ 27년 간 함께 살아온 여자가/ 청량리 성바울 병원 영안실에서 만났다"는 일입니다. 27년 동안 집나가 소식 한 자 없다가 죽음을 통해 만나게 된 본처와 27년을 함께 산 여자가 만난 것입니다. 구원(舊怨)이 왜 없겠습니까. 요즘 티브이 드라마 식으로 하면 죽자 사자 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어떤 장면이 인상적입니까? - "실랑이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재를 담은 항아리를/ 영구차에 모시는 일은/ 27년 간 살아온 여자 몫/ 그 항아리 고향 선산에 모시는 일은/ 헤어져 살았던 여자의 몫"으로 치르는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역할이 나뉘고 자연스럽습니다. 냉랭한 기운이 흘렀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원인 제공자의 부재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그 무언가 속에서,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두고/ 몸으로 우는 여자/ 속으로 우는 여자"가 있습니다. 어느 여자가 몸으로 울고 어느 여자가 속으로 울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울음의 형태는 달라도 '우는 여자'로 같습니다. 아니 그 울음은 이미 서로의 안감처럼 포개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27년을 같이 산 여자가 기뻤다면 그 안감처럼 미안함을 가지고 있어 그 여자의 삶으로 이미 오래되었고, 27년을 헤어져 산 여자가 서러웠다면 그 안감처럼 당당함을 가지고서 그 여자의 삶으로 이미 오래되었던 것입니다. 원인자인 사람은 죽어 없고,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고, 그러므로 그를 중심으로 꼬였던 두 삶도 마주설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둘의 서러움은 건널 수 없는 그 검은 강에 모두 던져야 합니다. 그것이 그 둘의 울음입니다. 그렇듯 검은 강은 울음의 의미를 묻지 않고 그저 흘러갈 뿐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 두 울음을 감싸는 구체적인 의미 감정이 생깁니다. - "그 사이 만큼이 삶이어서/ 봄여름가을겨울 거기에 있었겠지". 그냥 삶이었던 것입니다. 원한도 있고 서러움도 있고 행복도 있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독립된 것이 아니라 그저 봄여름가을겨울처럼 이어져 흘러갔던 삶이었던 것입니다. 봄이 겨울을 탓할 수 없듯이 또 여름이 봄을 탓할 수 없듯이 그처럼 삶이 있었던 것뿐입니다. 그리고 보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우리가 희로애락을 느끼는 주체이지만 또 삶의 객체로서 희로애락을 지닌 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삶에 대한 깊이가 생기지 않고는 화해란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가장 큰 화해란 봄여름가을겨울이 서로를 부정하지 않고 살 듯이 우리 또한 삶의 봄여름가을겨울 어느 하나에 붙들리지 않고 삶으로 모두를 받아들일 때 일어날 것입니다.
- 글/ 오철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