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elings 2006. 9. 3. 17:24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마지막 단맛을 스미게 하소서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십시오.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이틀만 더 남극의 날들을 베풀어

과일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짙은 포도송이에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나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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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4년쯤이었을 것이다.

한학기가 끝나는 날 어떤 학부형이 나에게 선물을 하였다.

그것은 예쁜시가 담긴 cd집이다.

제일처음 나오는 이음악속에 잔잔히 흘러나오는 릴케의 가을날

그냥 지나쳐 가는 세월속에

가을만 되면 이 시가 항상 생각난다.

한장을 넘기면 항상 좋은 마음을 간직하세요 치료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하면서

정성묵 엄마란 사인이 나온다.

 

 

20060903희숙

내용 연구

주여, 때가 왔습니다. : 가을이 온 것에 대한 깨달음의 표현이다. 작가는 만상(萬象) 속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언제나 몸 가까이 있는 신을 느끼고 있다. 여기서 '때'는 결실(結實) 또는 완성의 계절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 만물을 성숙하게 한 긴 여름 동안의 당신의 은총은 위대하였습니다. 만물을 성숙하게 한 신의 조화에 대한 경탄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 이제 서늘한 그늘을 주십시오. 서늘한 가을이 되었음을 나타낸다.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 성숙에 대한 시인의 간절한 기원이 드러나 있다. 만물을 완전히 영글게 해 달라는 기원이다.

독한 포도주에는 - 스미게 하소서 : 충분히 성숙된 만물에 존재의 본질적 의미가 구현되는 상태를 추구함. 절대자에 대한 기원의 자세가 강조된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 아직도 자신의 안식처를 갖지 못한 사람은 이제 그러한 안식처를 마련할 만한 겨를이 없습니다. 즉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인간의 불안과 공허감을 나타내었다. 여기서 집이 없는 사람은 존재의 거처를 잃어버린 고독한 인간이다.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 겨울을 맞는 인간의 고독, 불안감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러한 고독을 극복하고자 하는 내적 충실의 자세가 잘 드러나 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 고독한 인간이 방황하는 상태를 나타내고, 실존적인 불안의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시상의 전개

1연과 2연은 온갖 곡식과 과일이 익어가는 가을의 맑고 풍성함을 노래하여, 외적으로 충실한 계절, 가을의 특성을 표현하였고, 3연은 낙엽이 뒹구는 가로수의 길을 방황하게 될 집없는 사람과 고독한 사람을 그려 가장 고독한 계절로서 가을의 특성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3연의 고독에는 비애, 절망 같은 감상이 배제되었다. 글을 일고, 편지를 쓰고, 가로수 길을 낙엽과 함께 지니는 고독, 이러한 고독은 고독을 비관하는 사람의 고독이 아니라 고독을 수용하는 사람의 고독이다. 오히려 내적 충실을 위하여 고독을 희구하는 사람의 고독이다.

이 시는 가을의 풍성함과 쓸쓸함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시인은 오히려 쓸쓸함과 고독 속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 진정한 고독의 체험을 가진 자만이 신과 자연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방황과 실존적인 불안조차 긍정하는 것이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자연의 변화 앞에서 여러 가지 감회를 가지게 되는 시인의 성찰이 두드러진 역할을 하는 시로서 종교적이고 경건한 분위기가 시 전편에 흐른다. 시인은 가을이라는 계절의 이중적 속성, 즉 풍성함과 황폐함을 외적 세계와 내적 세계에 대비시켜 우수와 고독을 형상화하였다. 인간이 결실을 거두기 위해 흘린 땀과 대비하여 무수한 능력을 지닌 신의 권능을 생각하고 있다.

작품의 1연은 가을이 도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제 긴 여름 동안의 노고를 쉬고 이제 들에 서늘한 바람을 불게 해 달라는 것이다. 2연은 이미 익어 가고 있는 만물을 완전히 익도록 해 달라는 기원이다. 1연과 2연이 외적 세계의 풍성함과 결실을 노래한 것이라면 3연은 내적 세계의 고독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고독은 극복되어야 할 '외로움'의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실제적 고독(독서와 편지, 사색을 포함한 고독)으로 제시되어 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이란 영혼의 완숙을 갈망하며 방황하는 불안정한 존재인 고독한 인간을 나타낸다.

따라서, 고독한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내적 충실을 기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지만 그 고독한 사람이 바람에 불려 날려 가는 나뭇잎처럼 불안하고 방황할 것이라는 의식이 나타나 있다. 결국 이 작품은 가을이라는 결실과 조락(凋落)의 계절에 인간 존재의 본질을 생각하고 투시하는 서정적 자아의 경건성과 구도 정신이 간결하고 평이한 표현 속에 잘 드러난 서정시이다.

심화 자료

Rainer Maria Rilke 1875~1926

독일 시인. 보헤미아 수도 프라하 출생. 청년기 이후로는 유럽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각 지방의 문화를 흡수한 반시대(反時代)·반통속적인 시인이다. 병약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커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육군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한 뒤에 시를 쓰기 시작, 19세 때 시집을 출판했다. 프라하대학·뮌헨대학 재학 중에는 시·산문·희곡·평론 등을 썼고 몇 권의 책도 냈으나, 모두 신낭만파·자연주의·유겐트슈틸 등 그 시대와 전시대의 양식을 모방한 데 그쳤다. 1897년 뮌헨에서 알게 되어 일생동안 우정을 나눈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와 사귀는 동안 개성있는 일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르네상스회화에 눈을 뜬 그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루에게 보내기 위해 계속해서 쓴 《피렌체일기(1898)》, 루와 동행한 2회의 러시아 여행을 토대로 쓴 《시도시집(時禱詩集, 1905)》, 단편집 《하느님 이야기(1900)》 등이 이 때의 대표작인데, 방종하고 낭만적·신비적 감수성에 바탕을 둔 범신론적(汎神論的) 세계인식 방식이 두드러진다. 체코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공감을 표시하는 단편집 《프라하의 두 이야기(1899)》에는 훗날의 작품에는 나타나지 않는 사회적·정치적인 관심이 엿보인다. 1900년 브레멘 교외 보르프스베데 예술가마을에서 그 시대의 예술과 접촉하게 된 것이 인생과 일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다. 그 고장의 조각가 C. 베스토프와 결혼하고, 화가평전 《보르프스베데(1903)》를 완성한 뒤 《로댕론(1902~1907)》 집필을 의뢰받고 파리로 갔다.

이미 《형상시집(形象詩集, 1902)》의 몇 편의 시에서도 그때까지의 무한정한 정감유로(情感流露)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즉물적인 표현이 시도되고 있었지만, F.A.R. 로댕 밑에서 배운 손재주의 중요성과 <보는 일>에 바탕을 두어 《신시집(新詩集, 1907)》의 시를 계속 써 나갔다. <사물시(事物詩)>라고 하는 조소풍(彫塑風)의 조형성(造形性) 강한 이들 시는 자아(自我)와 대상을 동일시하고 감정을 객체화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며 대도시 파리가 만들어낸 현대사회의 생존 불안에 대한 대항물로서 의도된 작품이다.

그 시기의 《말테의 수기(1910)》도 역시 불안한 가운데서 로댕의 조각수법을 산문에 적용하여 새로운 현실성을 얻으려는 의지에 의거한 것이다. 그 뒤 10여 년 동안에 발표된 시집은 《마리아의 생애(1913)》뿐이지만 《말테의 수기》를 완성한 직후와 스스로 군무에 종사했던 제 1차 세계대전 때를 제외하고는 창작력이 쇠퇴하는 일이 없었다. 《신시집》에서 시에 대한 형식성을 초월한 새로운 시작법(詩作法)을 모색했는데, 거기서는 개개의 형상(形象)에 의지하였던 생의 불안을 직접 존재문제로 다시 수용하면서 아프리카와 에스파냐로 여행, P.R. 피카소의 그림이라든지 J.C.F. 횔덜린, P.A. 발레리의 시와의 만남 등에 의해 쌓은 정신적 양식을 바탕으로 하여 10년에 걸쳐 《두이노의 비가(悲歌)》가 이루어졌다. 동시에 쓰인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1923)》 등에서는, 삶과 죽음을 꿰뚫는 <열려진 공간>이라는 독자적인 시와 존재의 공간이 시사되어, 갖가지 형상으로 그것을 환기시키고자 했다.

실존주의와도 통하는 내용이므로 그의 시는 M. 하이데거 등에 의해 자주 철학적 고찰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시작(詩作)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독일어 표현능력을 높였고, 표현할 수 있는 시어의 영역을 확대시킨 점에 있다. 그것은 종래의 양식 또는 언어표현에 의해서는 파악이 불가능하게 된 근대도시의 생활감각에 대하여 신체감각 자체를 지성화하는 차원에서의 한 표현의지의 성과이다. 특히 후기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스스로 육체성을 갖춘 낱말에 바탕을 두고 시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시법(詩法)은 유럽 근대의 로고스중심주의를 벗어나 현실적 재구성을 도모하려는 현대시 방법과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만년은 주로 스위스 시에르 근처의 뮈조트성관(城館)에서 보냈다.

 릴케의 시풍과 우리 나라 시인들

릴케 시의 일반적인 특징은 종교적 신비주의(神秘主義)로서 만상(萬象)속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믿고, 그러한 신을 항상 몸 가까이 느끼며, 만상을 애정으로 직관(直觀)함으로써 그의 영적(靈的)인 세계를 넓힌 데 있다. '가을날'에 있어서도 신과 대면하여 담화를 하는 듯한 친근한 느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첫째 연(가을의 도래), 둘째 연(자연물에의 애정), 셋째 연(고독)의 세 가지 요인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시풍은 우리 나라 근대시에 큰 영향을 미쳤고, 윤동주, 김춘수, 김현승 등에 영향을 주었다.

윤동주선생은 순수한 동심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릴케의 시를 수용하였고, 김춘수는 사물에 내재한 존재의 본질에 대한 실존적 탐구로 릴케와 같은 맥락에 놓인다. 김현승은 인간의 본질적인 고독에 대한 경건한 성찰의 측면에서 릴케의 영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