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공부

across the bridge

feelings 2004. 1. 25. 23:54

It all seemed to me a little too touching to be true

as the old crook lay there with his  arm over the dog's meck,

dead with his million between the money changers' huts,

but it's as well to be humble in the face of human nature.

he had come across the river for something,

and it may, afrer all, have been the dog he was looking for.

It sat there, baying it stupid and mongrel triumph across his body,

like a piece of sentimental statuary: the nearest he could get to the fields,

the ditches, the horizon of his home.

It was comic   and was pitiable, but it wasn't less comic because the man was dead.

Death doesn't change comedy to tragedy,

and if that last gesture was one of affection.

I suppose it was only one more indication of a human being's capacity for self-deception,

our baseless optimism that is so much more appalling than our despair.

 

그 늙은 사기꾼이 백만금을 환전상들의 판자집에 남겨둔채 죽어서

거기 개의 목에 팔을 감고 누워 있다는 것이

내겐 어느정도 지나치리만 큼 비장해서 사실로  보이지 않았지만

인간 본성이라는 것을 앞에 놓고 볼때 겸허해져야 할 것이다.

그는 뭔가를 찾아 강을 건너왔었고 결국은 그가 찾았던 것이 개였을 수도 있다.

그 개는 마치 한점의 감상적인 조각처럼 거기에 앉아 그의 시신 위에다 대고

멍청하고 잡종개답게 승리의 기쁨을 짖어대고 있었다.

그렇게 아주 가까이 있음으로써

그가 고향의 들판으로, 도랑으로, 지평선으로 갈 수 있을 것이가.

그것은 우스꽝스럽고도 처량한 광경이었지만,

그가 죽었다고 해서 덜 우스운 것은 아니었다.

죽음 때문에 희극이 비극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며

만일 그의 마지막 손짓이 애정의 손짓이었다면

그건 바로 절망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우리 인간의 근거없는 낙천주의인 자기 기만의 능력을 보여 주는

또하나의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레이럼 그린의 쫓는자와 쫓기는 자를 모델로 한 이 작품은

도주중인 사기꾼이 못난 애견을 통하여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면서도

그 개를 학대하다 결국은 개 때문에 죽고 만다는 줄거리입니다.

인간은 다리건너 희망을 찾아 떠나나 결국 그것은 자기옆에

놓인 그 삶일 수 있을 것입니다.

미움으로 표현하는 그 자체도 하나의 자기표현의 삶으로 자리하겠지요

미움을 떠나보내고 남은 그 자리가 얼마나 크게 남는가 하는것은 결국

삶의 다음 차례이겠지요

우리의 삶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나의 옆의 현재 함께 존재하는 낙천적이거나 환상적이거나 절망적이지도 않은

존재 자체와 함께 한 것일 것입니다.

고운정보다는 미운정속에 끊지 못하는 애절함이 제맘속에서도 항상 여운을

남깁니다.

 

 

음악- 팀 맥 브라이언의 emeraude

 

20040126함희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