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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민자의 수필닷컴에서 질경이

feelings 2006. 3. 18. 12:03
아침부터 아내와 말싸움을 벌였다. 후덥찌근한 날씨 때문이라도 서로 한 걸음씩 물러 섰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탈이었다. 아니 어쩌면 남만 못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 때문에 말 끝에 가시가 박힌 탓인지도 모른다. 그 가시 하나하나가 자기와의 연(緣)을 하나 둘씩 잘라 버린다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가슴을 풀어헤치듯 현관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한여름 따가운 햇살에 잠시 멈칫하다가 게으른 걸음으로 하늘을 본다. 고흐의 작열하는 태양이 어쩌면 이리도 같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가 곧 어지러움증을 느낀다. 내리꼿는 햇살에 그만 주저앉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발 밑의 딱딱한 콘크리트는 내 발목을 타고 올라 목덜미에 후끈한 충격을 가한다. 뜨거운 지열에 반사적으로 다시 집으로 발을 재촉하는데, 문득 발밑으로 부드러운 느낌이 온다. 늘 그리워하던 흙 밟는 느낌은 아니었으나 분명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순간 머뭇거리던 발을 조심스레들어 보니 발 밑에는 누운 듯 달라붙은 작은 질경이들이 무리를 지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질경이는 길가나 빈터에서 잘 자란다. 그런 탓에 사람들 눈에 잘 띄기는 하나 볼품없는 생김새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는 못한다. 아니 관심은 그만 두고라도 오가는 사람들에게 늘 밟히고 채인다. 허기사 줄기도 없이 뿌리에서 뭉쳐 나와 마치 땅바닥에 엎드린 듯한 모양새도 그렇고, 꽃이라고 해야 향기는 물론이요, 꽃모양 또한 털빠진 강아지 풀같이 전혀 볼 품이 없다. 그러니 뉘라서 관심을 두겠는가! 천상 타고 나기를 밟히고 눌리도록 태어난 것을….

같은 들꽃임에도 민들레는 볕이 잘 드는 곳을 골라 핀다. 그래서 쉽게 밟히지도 않을뿐더러 그 모양새도 범접키 어려울만치 꼿꼿하여 사람들은 발길을 피해 간다. 질경이가 험난하고 척박한 곳에 아무렇게나 뿌리를 밖고 질긴 생명을 이어가는 명 긴 할머니라면 민들레는 언제든지 바람 부는 대로 홀가분하게 훌훌 털고 사라지는 깔끔한 십대의 아가씨라 하겠다.

책상 위에는 매근하게 가지치기를 마친 '파키라'가 있다. 언젠가 오랜 제자가 보내 온 것이다. 잘생긴 외모가 좋아서 날마다 물도 주고 잎도 닦아 주었더니 잘라버린 잎 끝으로 새순이 삐죽삐죽 머리를 내민다. 갓난 아이의 보드라운 살결같은 새순을 보면 길가에 내버려진 질경이 녀석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파키라는 며칠만 돌보지 않아도 맥을 못추고 시들어 버린다.

'저마다 타고난 복이있다'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경박고 이별'이라는 꽃말에도 불구하고 민들레는 목을 곧추 세운 듯한 도도함과 쉽게 날리는 자유분방함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 그런가 하면 파키라는 이국적인 정취와 빼어난 기품으로 실내 원예의 한 중심을 차지한 채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그런데 질경이는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다. 그러니 따뜻한 손길은 고사하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밟히기 예사다.

허리를 굽혀 엎드린 잎을 살짝 들춰 보니, 콘크리트 블록 틈 사이로 질경이가 몸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어떤 녀석들은 돌층계 계단과 계단 틈 사이에서 마치 자기를 한번 보아 달라는 듯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들은 남다른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심하게 짓밟혀도 잘 살아 남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니 어쩌면 질경이는 역경 속에서 더 잘 살아 남을 수 있는 남다른 것을 복으로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질경이의 삶에 대한 열정은 아마도 한번 뿌리 내린 자신의 터에 대한 끈질긴 연(緣)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발길에 채여도 늘 그곳에 남을 수 있는 그런 연 말이다. 뽑아내려 안간 힘 쓰면 쓸수록 열 길 땅 속으로 얽히고 설켜 온 마당이 다 뒤집혀 사단(事端)이 나야 해결되는 그런 연에서….

고개 들어 하늘을 본다. 작열하는 태양에 전신이 타들어 가는 듯하다. 어지럽다.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질경이를 보니 나를 닮은 녀석이 미소를 짓는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 남들처럼 잘난 것 하나 없는 모습은 녀석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민들레 같은 홀가분함이나 파키라 같은 수려함, 그 어느 하나도 갖추지 못한 내 자신을 돌아 보기가 겁난다. 어느날 갑자기 기댈 곳 없이 뒷전으로 밀려날 듯 불안핟. 차라리 질경이 같이 내가 몸담고 있는 곳에 깊은 연이라도 담으면 좀 나을텐데….

이제 나도 질경이를 닮고 싶다 내가 있을 곳에 질경이 같은 연을 맺으련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나는 이곳의 뿌리 깊은 주인이라고, 그래서 그것을 40대의 위안으로 삼으며 불안을 날려 버리고 싶다. 이 뜨거운 여름이 다하기 전에 질경이 같은 단단한 연 하나 뿌리 밖도록 나를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겠다. 나는 어느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아내를 찾고 있었다.